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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제주, 김만덕 기념관

무니muni 2019. 1. 29. 0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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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만덕 기념관을 관람했다. 집에서 가까운 곳에 있는데 그동안 가보지 못했다. 집 근처를 다니는 여행을 시작하려고 한다. 올레길도 걷고 관광지도 가려고 한다. 먼 곳으로 떠날 수 없으니 가까운 곳으로 여행을 떠나는 것이다. 다행히 제주에 살아서 가볼 곳은 많다.

기념관 입구에는 짐을 무료로 보관할 수 있는 보관함이 있다. 배낭이나 캐리어를 넣어두고 가벼운 복장으로 관람할 수 있다.

입구로 들어서면 제일 먼저 김만덕의 동상과 <탐라로 돌아가는 만덕을 보내며>라는 시가 쓰인 유리가 보인다. 조선 후기의 학자인 이가환(李家煥, 1742~1801)의 시문집 <금대시문초(錦帶詩文鈔)>에 실린 글이다.

<탐라로 돌아가는 만덕을 보내며(送萬德還耽羅)>

만덕은 제주도의 기특한 여인으로 / 萬德瀛洲之奇女
예순 살 얼굴빛이 마흔쯤 보인다네. / 六十顔如四十許.
천금으로 쌀을 사서 백성들 구제하고 / 千金糴米救黔首
한 척 배로 바다 건너 임금님 알현했네. / 一航浮海朝紫禦.
소원 오직 금강산을 구경하는 것이어서 / 但願一見金剛山
금강산은 동북쪽의 연무 속에 있었다네. / 山在東北烟霧間.
임금께서 날랜 역마 하사토록 명령하여 / 至尊啣肯賜飛驛
천리 뻗힌 빛의 광채 관동 지방 진동했네. / 千里光輝動江關.
높이 올라 굽어보며 마음의 눈 크게 뜨고/ 登高望遠壯心目
표현히 손 저으며 바다로 돌아가네. / 飄然揮手還海曲.
탐라는 고·부·양 삼성(三聖)부터 있었지만 / 耽羅遠自高夫良
여자로선 처음으로 서울을 구경했네. / 女子今始觀上國.
칭찬 소리 우레 같고 고니처럼 빼어나니 / 來如電喧逝鵠擧
높은 기풍 오래도록 세상을 맑게 하리. / 長留高風灑寰宇.
인생에 이름 세움 이런 경우 있겠지만 / 人生立名有如此
여회청대 그 기림은 얼마나 꼽히겠나. / 女懷淸臺安足數.

동상 발치에는 쌀포대가 쌓여있다. 쌀포대에는 <김만덕 사랑의 나눔쌀>이라고 적혀있고 기부한 사람의 이름과 단체명이 적힌 리본이 붙어있다.
안내데스크에서 어떤 남자가 인사를 한다. 그는 이곳의 관람료는 무료이고 3층부터 내려오면서 관람하면 된다고 알려준다.
3층에 올라가니 김만덕의 초상이 먼저 보인다.

김만덕은 12살에 부모가 돌아가시고 고아가 되었고 이후 기생집에 맡겨져 20살에 기생이 되었다. 그녀는 24살에 기생을 그만두고 객주를 운영하여 유통업으로 제주에서 최고의 부자가 되었다. 그녀 나이 57세 되던 해(1795년)에 계속된 흉년으로 제주에 굶어죽는 사람이 늘어나자 전재산을 털어서 육지에서 쌀을 500석을 사와서 관가에 기부했고 굶어죽어가던 제주 사람들을 살렸다. 그 공로를 인정받아서 한양으로 가서 당시 왕이었던 정조를 만났고 금강산을 유람했다.

<은광연세(恩光衍世), 은혜의 빛이 온세상에 퍼지다>라고 쓰여진 글씨가 보인다. 추사 김정희(金正喜)가 김만덕의 후손에게 써준 글씨라고 한다.

2층에는 <함께 사는 세상>이라는 제목으로 그림을 전시하고 있고 전시된 그림은 판매도 하고 판매금의 일부는 어려운 이웃에게 기부된다고 한다. 70만원, 100만원, 300만원, 그림값이 각기 다른데 아내가 좋다고 마음에 들어하는 그림은 70만원이다.


김만덕은 어떻게 최고의 부자가 되었을까, 그것이 궁금했다.

싸게 많이 팔고, 적정한 가격으로 팔고, 신용을 지키는 거래를 했다는 당연한 말 외에 그녀가 미인이었고 싱글이었고 자신의 전재산을 기부할 정도로 인품도 대단했다는 것이 큰 부자가 될 수 있었던 비결이 아닐까라고 추측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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