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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택시 12

무니muni 2018. 8. 10. 18:29

어스름한 새벽에 문을 열고 집에 들어왔다. 마당에서 귀뚜라미 소리가 잔잔하게 들린다. 가을이 은밀하게 오고 있다. 여름이 한창이지만 밤에는 서늘한 기운이 있다.

한낮의 열기가 피부에 붙어서 끈적끈적하다. 찬물로 샤워를 하고 잠자리에 누웠다. 창문 너머로 귀뚜라미 소리가 들린다. 넌 왜 밤에 우는거니? 멍청한 질문이다.


잠이 오지 않는다. 밤에 먹은 커피 때문이다. 밤새 일해야 하니 졸지 말라고 커피를 마신다. 졸다가 위험했던 적이 몇 번 있었다. 블랙으로 마시면 속이 쓰리다. 위장도 낡아간다.

잠을 깨고 눈을 뜨니 사방이 훤하다. 멀리서 집을 짓는 공사장의 기계소음이 시끄럽게 들린다. 예전에 새소리에 잠을 깨던 산속의 아침이 떠오른다. 산속마을이라고 해서 기계음이 없는 것은 아니다. 경운기 소리, 트랙터 소리, 예초기 소리, 자동차 소리, 오토바이 소리. 기계는 우리의 삶 속에 깊이 들어와 있다.


간혹 전에 내 택시에 탔던 동일한 사람을 내 택시에서 또 만나는 경우가 있다. 버스라면 자주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지만 택시는 그런 경우가 흔하지 않다. 드문 일이다. 나는 지금까지 세 번 있었다. 제주시가 그렇게 큰 도시는 아니라는 뜻이기도 하다. 서울에서는 그런 경우가 없었다. 첫번째는 출근시간에 시청으로 가는 승객을 태웠는데 승객이 먼저 어떤 길로 가야할지 설명을 해주는 바람에 알아차리게 됐다. 어, 예전에도 이런 적이 있었는데, 그럼 그때 그 사람? 그 사람은 나를 알아보지 못하는 눈치였다. 아니면 알면서도 모르는척 하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두번째는 밤에 시장입구에서 같은 사람을 택시에 태운 경우다. 목적지도 동일하고 술냄새가 나는 것도 같고 만난지 며칠이 지나지 않았기에 금방 알아 볼 수 있었다. 세번째는 옷가게를 하는 사람이었다. 같은 탑승장소, 같은 하차장소, 며칠 지나지 않은 만남의 간격, 이 세가지 조건이 맞으면 같은 사람을 만난 것이 확실하게 증명된다. 이 세가지 조건이 맞지 않아 같은 사람을 만났지만 모르고 지나간 경우도 있을 것이다. 옷가게를 하던 그 사람은 개인 사정으로 몇달간 가게를 열지 못해서 손님이 다 떨어져 나갔다고 걱정이었다. 다시 회복하려면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다. 장사가 쉽지 않다. 쉬는 날만큼 매출이 떨어지니 쉰다는 것은 수입의 감소다. 쉬어도 수입이 보장되고 쉬는 만큼 오히려 매출이 늘어나는 일은 없을까?


"cgv로 가주세요." 여자는 가는 동안 택시 안에서 화장을 한다. 집에서 화장을 할 시간도 없이 바쁘게 나온 것이다. 그런 사람들이 많다. 택시에 탈 때의 얼굴과 내릴 때의 얼굴이 완전히 달라져서 깜짝 놀랄 때가 있다. 화장은 얼굴을 예쁘게 보이도록 꾸미는 것이다. 예쁘지 않은 얼굴을 예쁘게 꾸민 것은 과연 정말 예쁜 것인지. 화장을 하지 않고도 예쁠 수는 없는지.

약속시간에 늦어서 미안하다고 전화를 하는 그녀는 만남에 대한 기대로 기분이 들떠있다. 아마도 남자친구를 만나러 가는 모양이다. 약속시간에 늦어서 거짓말로 금방 도착한다고 변명을 늘어놓는 남자가 기억난다. "거의 다 왔어. 1분이면 도착해." 내가 보기에 적어도 10분은 더 걸릴 것 같은데 가는내내 전화를 하면서 금방 도착한다는 말로 여자친구를 달래고 있다. 여자친구가 무서운 모양이다.


"저기 세븐일레븐 앞에 내려 주세요." 그녀는 편의점 알바생이다. 발걸음이 무겁다. 삶의 무거움이 느껴진다. 아무런 말이 없었다. 간혹 깊게 한숨을 쉬는 청년들을 볼 때가 있다. 택시 안은 좁은 공간이다. 한숨 소리도 나에게는 크게 들린다. 나도 젊은 시절에 한숨을 쉬는 버릇이 있었다. 요즘은 없어졌다. 언제부터 없어졌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지금도 삶이 힘들기는 마찬가지지만 그때와는 삶의 자세가 달라졌다. 힘들어도 인생은 어떻게든 굴러가고 나를 힘들게 하는 것들은 하나둘 사라졌고 나도 언젠가는 사라질 것이다. 모두다 사라진다. 슬픈 것도 기쁜 것도 다 사라진다.


중년의 남자와 여자가 택시에 탔다. "뭐 먹으러 갈까? 초밥먹을까? 초밥 어때? 더운데 시원하게 초밥먹자. 아니면 뜨끈하게 숯불 피워서 고기 구워 먹을까?" 남자는 무엇을 먹을지 고민이다. 여자의 결정을 기다린다. 여자는 초밥을 먹기로 한다. 그런데 아니다. "지금은 초밥 먹고 이따가 고기에 술을 먹자." 여자는 둘 다 먹고 싶었던 모양이다. 두 사람이 부부는 아닌 듯이 보인다. 말과 태도로 어떤 관계인지 대충 짐작이 간다.


엄마와 중학생 딸이 택시에 탔다. 교보빌딩 앞을 지나면서 딸이 푸념을 한다. 제주에는 교보문고가 없다는 것이다. 교보문고에 가면 큰 문구점도 있어서 좋다는 것이다. 교보문고가 제주에 들어오면 작은 서점들은 전부 문을 닫을 것이다. 작은 문구점들도 마찬가지다. 왜 제주에 백화점과 교보문고가 없는지는 모르겠다. 무슨 이유가 있을 것이다.


공항에서 승객을 태우고 보니 밤 9시 59분, 1분 차이로 쿠폰을 받지 못했다. 재수가 없는 날이다.


자판기 커피를 애용하는데 공항의 자판기 커피가 가장 맛있다. 많은 사람이 이용하고 관리가 잘 되고 있어서 그런 것 같다. 400원이면 맛있는 커피를 먹을 수 있다. 피곤하고 잠이 올 때 달달한 커피 한 잔이 졸음과 피곤함을 몰아낸다.


오늘은 일이 잘 안되는 날이다. 겨우 입금을 채우고 마지막 승객을 태웠다. 여자다. 술냄새가 난다. 밤에 택시타는 사람은 거의 술냄새가 난다. "기사님, 낮에 다른일 하세요?" 내 손목에 찬 보호대를 보고 하는 말이다. 손목이 아파서 얼마전부터 오른손목에 보호대를 차고 일한다. "이렇게 힘들게 일하는데 얼마나 버세요? 벌이로 생활이 되세요?"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이 택시운전을 해서 실상을 알고있다는 듯이 말한다. "차라리 도배를 하든지 뭐 다른 일을 하는게 더 낫지 않아요?" 당돌한 여자다. "택시를 왜 하세요?" 할 말이 없다. 그저 어쩌다보니 하게 됐다. "차라리 다른일 하세요. 택시하지 마세요." 나는 당황스럽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을 전에도 만났다. 차라리 다른 일을 하라고 충고한다. 벌이는 안되는데 몸은 망가진다고. 진심으로 걱정한다.


나는 택시를 왜 하는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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